수잔 손탁의 '타인의 고통'을 앞부분만 읽었더라면 이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의 글은 뒷부분으로 갈수록 점점 더 무게가 더해져 독자의 생각과 마음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 책의 부록 부분까지 다 읽고 나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통은 경험을 절대화하고 타인의 접근을 막는다. 특히 그것이 육체적으로 극한의 지점에 다다른 고통일 때 언어는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스스로를 '이야기꾼'이라고 칭하는 수잔 손탁은 그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도 사진에 찍힌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1994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위 사진을 찍은 케빈 카터는 상을 받은 3개월 뒤 자살하고 만다. 수단 남부 아요드의 식량 센터로 가는 도중 카터는 굶주림으로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기아 상태의 소녀 뒤로는 독수리 한 마리가 이 소녀의 죽음을 기다린다. 카터는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고는 바로 독수리를 쫓아버리고 소녀를 구했다. 그러나 이 사진이 발표되고 카터가 퓰리처상을 받자 비판이 일어났다. 사진 촬영보다는 소녀를 먼저 도왔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수상 3개월 후 1994년 7월 28일 카터는 친구와 가족에게 유서를 남긴 채 서른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아의 현장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그 거리만큼이나 안전한 장소에서 신문을 펼쳐 들고 사진 속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사람들의 가식적인 진실이 또 하나의 무고한 생명을 빼앗은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당신은 어떤 타인의 고통을 알 수 있는가?
내가 '살아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라는 믿음을 처음 가지게 된 것은 중학교 때 일이다. 대형서점 한구석에 꼽혀있던 전쟁 기자들의 보도 사진집. 비록 ‘과거’라는 코드가 분명히 드러나는 흑백 사진들 -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로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있었던 전쟁의 모습 - 이었지만 나는 그 사진에서 처음으로 리얼한 인간의 참상을 보았다. 개구리처럼 오그라진 다리, 분명히 비명을 지르면서 죽었을, 입만 쩍 하고 벌린 불에 탄 시체의 얼굴. 그들 모두 사고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살해된 것이었고 전쟁터에서는 그것이 바로 '성공적 작전 수행의 결과'였다. 이후 나이가 들며 끔찍한 보도사진을 간혹 접할 수 있었지만 단언하건대 중학교 시절의 그 사진집에 대한 나의 기억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절대성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미 다른 글에서 나는 이 중학교 시절의 경험을 적은 바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백하지 않았던 것이 있다. 그때, 그러니까 내가 대형서점의 한구석에서 보도 사진집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던 순간, 난 마치 몰래 도색잡지를 훔쳐보는 듯 은밀한 느낌을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수잔 손탁의 '타인의 고통'을 읽기 전까지 대략 이십여 년의 시간 동안 단지 금지된 장난과도 같은, 즉 아이들이 봐서는 안 될 것을 서점의 군중 속에서 몰래 훔쳐보면서 느낀 은밀함으로 석연치 않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손탁의 에세이를 마지막 한 줄까지 다 읽은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그 무엇은 바로 공포와 관음증이 버무려 낸 은밀하고도 묘한 쾌감이었다. '들여다보기'가 살아가는 방식인 비디오그래퍼가 되어있는 나에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잔 손탁의 말처럼 '쏜다(shot)'는 개념으로 인해 사진 찍기와 총질이 배후에 어떤 맥락을 공유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도 당연해 바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총을 쏘면 존재가 사라지고 사진을 찍으면 존재의 흔적(trace)이 남는다. 사진을 언제 처음 찍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 총을 쏘았던 기억은 생생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의 임원으로 군부대에 방문했을 때 군인들은 우리의 방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철모를 씌워주고 M-16 소총을 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총의 반동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나이였기에 장병 한 명이 사격을 도와줬지만 방아쇠를 당긴 것은 분명히 나였다. 사격게임을 잘했고 삼촌이 하던 양궁 장에서 활도 쏘아본 경험이 있었지만 그날 격발의 진동과 함께 멀리서 노란 가루를 공중에 퍼트리며 터진 사격 목표 잉크병을 본 것은 소름 끼치는 경험이었다. 동네에서 칼싸움 총싸움을 하루에도 몇 번씩 했지만 막상 실제 총을 쐈을 때, 거기엔 어떠한 신비감이나 영웅적인 느낌도 없었다.
나이를 더 먹고 고등학생이 되어 학교 선배님이 사단장으로 계신다는 3사단에 일주일간 전방입소를 한 기간 동안 나는 다시 총을 쏴 볼 기회를 얻었다. 이번엔 누가 옆에서 총을 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서 총은 완전히 나의 것이 되었고 ‘처녀 젖가슴 만지듯 부드럽게’를 외치는 조교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오래전처럼 또다시 과녁의 목표물에는 총소리와 함께 총알이 날아가 박혔고 그 증거로 분말 잉크가 담긴 병이 터져나갔다. 총을 쏘면서 내가 궁금했던 것은 나 자신의 반응이었다. 어린 시절과 달리 색다른 쾌감을 느낄 수 있을까 알고 싶었다. 그리고 결과는 정반대였다. 초등학교 때의 소총 사격이 왜 그렇게 끔찍했는지 이제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누구든 내 과녁에 들어오면 내 손끝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렇게 싱겁고 무심하게 돌이킬 겨를도 없이 한번 발사된 총알은 아무 목표를 파괴한다. 내 눈에 띄면 넌 죽는다. 그것이 내게 국산 소총을 건네며 총의 성능을 자랑하던 장교의 요지였다. 만약 전쟁이 나서 총질을 밥 먹듯 하고 살인에 무감각해지면 어떨지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 우리는 군에 입대해 일주일만 사격을 해도 감성이 무뎌질 것이다. 그러나 총의 과녁을 들여다보는 것, 방아쇠를 당겨 어깨가 덜컹할 정도의 폭약이 터지고 불을 뿜는 총구로부터 순식간에 목표지점까지 날아간 총알이 목표물을 파괴하는 것은 전혀 영웅적이지도, 로맨틱하거나 에로틱하지도 않다. 그런 것을 느끼기에는 총이라는 살인기계의 반응 속도가 너무 빠르고 결과 또한 너무 처참하다. 총은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의 기계 작동과 반응, 그리고 그 결과와 절대로 비교되거나 수사학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엄청난 갭이 있다. 바로 생과 사의 실질적 문제다. 수잔 손탁이 만약 카메라 대신 총을 들고 사람을 쏘았더라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 자신마저도 카메라를 내세워 총을 romanticize하고 있다는 사실을.
캐롤린 콜이 담은 이 주검들은 2003년 8월 라이베리아에서 찍은 사진이다. 같은 날, 유엔 평화 유지군이 도착했다. 10년간의 내전에서 2백5십만 명의 목숨이 사라졌고 3백2십만 명 이상이 난민이 되었다. 그런데, 다소 생뚱맞을지 몰라도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숫자와 관계없이 왜 백인의, 서유럽인의, 미국인의 학살에 관련된 보도사진은 기억해 내기 힘든가? 어째서 적군이 아닌 아군이 몰살당한 사진을 본 기억은 없는가? 수잔 손탁은 이점에서 탁월한 예리함을 보인다. 그녀에 의하면 이유는 굴욕적인 죽음의 이미지가 늘 ‘나와는 관계없는 타자의 것’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수치와 굴욕은 유태인의 것, 팔레스타인인의 것, 독일인의 것, 아프가니스탄인의 것, 이라크인의 것, 나치와 알케이다의 것이며 '나와 우리'에겐 그런 일이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이기적 자기모순, 수잔 손탁은 그러한 이율배반적인 관념을 통렬히 비판한다.
내가 중학교 시절 보았던 그 잔혹한 보도사진 중에서 가장 충격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청일전쟁 당시 도망치다 몰살을 당해 강을 메운 청나라 군인들의 시체였다. 그전까지 나는 시체로 강을 메운다는 것이 문학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학적인 표현만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 더구나 사진 속의 강이 작은 개천이나 샛강이 아니라 조선 땅의 청천강이라는 사실을 '보게'되었을 때 중학교 1학년 학생이 받았을 충격에 대해서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찌 됐든 수잔 손탁의 말처럼 어디까지가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적정 범위인지 몰라도, 우리는 이러한 충격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우리 아이들을, 우리 가족을 보호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페이스셔틀이 공중폭발로 가루가 돼도, 세계무역센터 빌딩이나 삼풍백화점의 폐허 사이사이에 조각난 팔다리가 나뒹굴어도 또, 폭탄 차량의 공격에 일순간 생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우리 젊은 병사들이 아무리 울부짖어도 그러한 이미지는 차단되고 소멸되어 얼마 후면 이 세상에 존재조차 한적 없는 신기루가 되어버린다. 그럴 때마다 내세워지는 그럴듯한 변명은 '사기 저하', '초상권 보호', '가족들의 심기에 대한 배려‘ 등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가 '알 권리'를 막는 정치적 목적의 검열이라고만은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단만 그러한 인도주의적인 차원의 배려가 진실로 인도주의 정신의 발현이라면 중동이나 아시아,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배려가 적용되어야 한다.
보도사진전을 가보면 대부분 불행한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 반대편 어딘가에 존재할 듯한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줄을 서서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에서 국제적 명성을 자랑하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보도사진들을 줄을 서서 입장해 구경하는 모습에서 비애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관람객들이 값싼 동정심을 발휘해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그러한 보도사진이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스펙터클의 쾌와 카타르시스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엿보며 느끼는 공포 속의 안도감, 그리고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기에 느끼는 인간적 연민, 안타까움 등은 처절한 고통의 현장을 한낱 구토와 어지럼증 그리고 하루 종일 또는 며칠이고 이어질 불쾌감으로 격하시킨다. 어째서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소위 '서방세계 언론인'이라고 불리는 작가들에 의해 촬영된 5.18 광주의 모습이 전시되지 않는가? 너무 진부해서? 1980년 5월의 한국의 한 도시에서 있었던 폭력의 현장을 당시 서방 세계인들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혹시 세계 어딘가 어느 문화회관에서는 혹시 5.18 당시 우리의 처참했던 모습을 입장권으로 팔아먹진 않았을까? 만약 우리가 로켓포의 공격에 양팔을 모두 잃은 이 12살짜리 소녀를 모자이크 처리 하나 없이 모든 신상명세와 함께 바라볼 수 있다면 그와 똑같은 이유로 제시카 린치를 바라볼 수 없는 타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제시카 린치는 이라크전 당시 기습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가 해병대의 구조로 생환된 뒤 일약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스무 살의 미국 여군이다.)
타인의 고통만큼이나 쉽게 평가절하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타인의 작업이다. 수잔 손탁의 글에서 고야와 제프 월의 작업은 성공적인 고통에 대한 투영으로, 그리고 그 외에 많은 사진작가들의 작업은 비난의 대상으로 비추어졌지만 사진작가로서 어떤 것이 진실을 보여주는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있는지는 너무도 주관적이고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될 수 있는 복잡하고도 까다로운 문제다. 뿐만 아니라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 개개인에게 있어서도 사진의 미혹으로부터 건전한 이성의 눈을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기준은 늘 변화한다. 거기엔 정신적 성장의 과정에 따른 시점의 변화가 있을 수 있고, 때론 이 변화가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예컨대 몇 년 전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았던 한 장의 사진이 몇 년 뒤 다시 보았을 땐 거의 하나의 사기극에 가깝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또 반대로 전에는 폭력만이 가득 찬 이데올로기 선전 극으로 보이던 사진이 새로운 진실로 다가올 수도 있다. 특히 이러한 부분에서 비난과 축복의 대상이 동시에 되었던 살가도의 작품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곱씹어 볼만하다. 살가도의 사진 작품이 갖는 특징은 뛰어난 묘사에 있다. 너무 뛰어난 나머지 그의 작품을 고야와 같은 회화의 수준에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미화된 보도사진의 대표작으로 보아야 할는지는 쉽게 결정할 수 없다. 살가도의 사진은 르네상스 시기의 성화인가, 고통을 고발하는 고야의 연작인가, 갖가지 기괴한 고문의 장면을 인쇄했던 중세풍의 동판화인가, 아니면 정확히 균형 잡힌 미와 추의 철학적 사유물인가 등등..
살가도의 작품이 고발하는, 또는 묘사하는 고통의 이미지는 초월적이면서도 여전히 현실의 아픔이 담겨있는 특이한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 조르주 바타이유가 백 조각으로 찢기는 형벌을 받는 중국인의 사진을 언제나 감상할 수 있도록 서랍에 간직했던 이유와, 살가도의 작품을 구입한 사람이 그 사진을 어딘가에 걸어 놓고 감상하는 것을 과연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야 옳을지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살가도는 자신의 사진을 통해 예술이나 혹은 인간의 비극을 기록하는 것이 아닌, 삶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말이 얼마나 그를 비난자들로부터 보호해 줄지는 모르지만 그가 하나의 사진을 얻기까지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가, 또 그 노력은 어떠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프리카의 기아 현장에서 대부분의 매체들이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이틀 정도 머물렀던 것에 비해 살가도는 몇 주씩,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머무르며 가능한 한 현지인들의 생활에 녹아들고자 노력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안전이나 편의를 도와줄 시설물의 사용을 되도록 금하고, 장기간의 시간을 들여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해가는 방식을 택했고, 이런 이유로 분명 그의 사진은 무엇인가 다르다는 느낌을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있었는지는 작가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요, 또 그 노력이 얼마나 성공적인 것인가에 대한 평가는 비평가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일은 이 글의 맨 앞에 놓인 사진, 기아에 허덕이는 소녀를 촬영한 탓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게 된 무고한 젊은 사진작가의 비극이 주는 교훈이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담는 작가의 아픔 또한 못지않다는 사실이다.
살가도의 작업에 대해 특별히 변호하거나 비난하려는 생각은 없다. 당장에 텔레비전만 틀어도 내셔널지오그래픽을 통해 힘든 삶을 미화된 렌즈로 하루 종일 보여주는 오늘날, 차라리 쉽게 ‘이것은 propaganda이다!’라고 결정지을 수 있는 판단의 기준이나 근거라도 있다면 우리들의 마음은 조금 더 편안해 질지 모른다. 그러나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작가의 도덕성은 고민에 빠지고 그의 시대를 고발하려는 정신은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고, 어쩌면 순수라는 것 또한 끝없는 번민 속에 이따금 떠오르는 작은 징검다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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