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컬쳐

매체연구: 미디어의 역사와 전략적 구성 요소

구름산신작가 2021. 1. 24. 17:38
반응형

"인간의 의식을 형성하는데 기여하는 전자 미디어의 발달은 후기 산업사회의 경제를 주도한다."

 


20세기 후반의 주요 전자 미디어;
뉴스 위성, 컬러텔레비전, 카세트, 비디오테이프, 케이블 텔레비전, 화상 전화기, 라디오, 컴퓨터 등

이러한 새로운 전자 미디어는 구시대의 미디어(인쇄, 레이다, 필름 등)와 접촉하여 더욱 새로운 영역으로 발전해 간다.

독점 자본은 전자 미디어, 혹은 뉴미디어 산업의 발달을 증폭시켰다. 미디어의 거대자본에 대한 의존성은 사실 그 자체의 내부적 모순으로써 (더 다양한 정보를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이 재확산시켜야 한다는) 사회주의 미디어 이론가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미디어 산업은 막연히 자유주의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이나 또는 노조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만으로는 복잡한 특성을 가진 미디어 산업(다양한 종류의 미디어 업체와 한 업체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보 생산의 단계)의 경제-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현재까지 막시즘을 통해 풀어 나간 미디어 이론이 전무하다는 사실도 이러한 미디어의 자본의존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Mobilizing Power of Media

전자 매체가 그 모바일적 특성으로 인해 권력을 획득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여기서 모바일이란 말 그대로 모바일을 말하는 것으로 운동선수나 댄서, 또는 게릴라처럼 활동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소포는 모바일일까? 물론 아니다. 소포는 이리저리 움직여질 뿐이다. 퍼레이드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한 자리에 묶여 서서 움직이지 못한다. 정치적 선전이나 정책 역시 모바일의 개념에 속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자유의지가 있고 능동적이며 참여도가 높은 것일 때 모바일하다고 볼 수 있다. 구 전자 미디어 시대에 무선전신 애호가들의 활약상이나, 오늘날 인터넷에서 간혹 번지는 강력한 시민 참여가 이에 해당한다.


오웰의 환상

오웰이 상상했던 어두운 미래상은 절대적이며 단 하나뿐인 미디어 독재의 사회였다. 오웰은 정보를 독점하는 소수가 권력도 독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의 미디어 산업은 자가수렴이라는 원칙으로 인해 이와는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 나간다. 미디어가 많은 사람들을 우롱하고 때론 여론을 어느 한쪽으로 몰고 갈 수는 있어도 어느 한계 이상으로 시청자를 무시하는 미디어는 없다. 도리어 미디어는 시청자의 의견이 강력해지면 여타의 이익 집단 보다도 더 약삭빠르게 반응한다. 특히 정보의 자유로운 교환에 의지하고 있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정보의 흐름을 일방향적으로 하여 다수를 억누른다는 것은 길게 봐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전자 미디어는 단순히 정보의 네트워크를 더욱 강력히 구축할 뿐 아니라 정보를 밀도 있고 빠르게 전달한다. 50년대의 라디오 전쟁이나 오늘날 인공위성에 대한 치열한 다툼은 이러한 전자 미디어 산업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또한 구 소련의 예처럼 정보를 차단하여 그들의 대규모적 부정을 숨기려고 할 때 전자 미디어가 갖는 즉각성이나 복제성은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전자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검열의 개념과 그 적용은 더욱 예민하면서도 모호한 정치적 쟁점이 되어왔다.


Cultural Archaism in the left Critique

60년대 신좌파의 미디어 이론은 미디어의 발달을 조종 혹은 조작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축소시켰다. 이러한 관점은 학문 탐구에 있어 유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를 분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이 이론은 여러 모순으로 부적적하게 되었고 좌파 미디어 이론가들은 방어적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좌파 미디어 이론가들은 미디어의 순결을 얘기한다. 그러나 정말로 미디어가 순수할까? 사실 미디어는 천성적으로 '더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더러움이 바로 미디어가 갖는 생산성과 권력을 낳는다. 도리어 미디어의 순결은 파시즘으로 변질될 수 있다. 더 좋은 미디어 컨트롤이란 것이 있다면, 누가 혹은 어느 그룹서 서 그것을 관리하고 조종해야 한다는 말인가? 정당에서?


Democratic Manipulation

사회주의 독재 정치하에서는 왜 전자 미디어 등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을 두려워할까? 첫째로 그들은 최초에 자신들이 혁명을 시작하던 시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혁명 초기 인쇄매체를 이용해 전단을 만들어 자신들의 주장을 대중에 환기시킬 때 지하 인쇄소는 일종의 미디어 산업장이었고 혁명은 여기서부터 번져나갔다. 전자 미디어의 경우, 간단한 장치만 있으면 누구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에 반응하는 엄청난 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이제 혁명의 불꽃은 어디서든 번져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다수와 전쟁을 벌이는 것과 같으며 사실상 사전에 방지하거나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roperties of the New Media

뉴미디어는 부르주아 문화에 포획되지 않는 많은 것들을 생산해 낸다. 예컨대 과거 부르주아가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를 자본으로 전유하였다면, 오늘날 생산된 뉴미디어의 문화상품은 같은 방식으로 전유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뉴미디어의 생산물에 역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역사성이 강한 무엇인가를 기록해 보관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을 뉴미디어는 제공한다. 다만 언제든 현재라는 시간 속에 과거의 것을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에 역사성으로 인해 생기는 부가가치가 상쇠 하는 것이다. 과거의 회화와 오늘날의 디지털 사진을 생각해 보면 그 차이를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회화의 경우 그림의 내용뿐 아니라 그 그림을 담고 있는 재질이 시간 속에서 변형된 부분까지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반면, 디지털 사진의 경우 시간이 더 흘러 해성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진 상황에서 디지털화된 시각적 정보만으로는 '매질로 인한 시간성의 부가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사회주의 미디어 전략의 허와 실

대체로 사회주의적 미디어 전략은 미디어로부터 고립된 개개인을 미디어 산업 생산과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개개인들을 조직화되기 전에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점은 미디어에 있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사회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자들이나 테크노크라트들과 일부 공유하는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구든 하드웨어나 혹은 그것을 이루는 시스템의 기술에 의해 해방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진보라는 불분명한 믿음의 희생자인 셈이다. 누구든 미디어의 자유가 개인들의 적극적인 통신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 역시 환상에 가깝다. 테이프레코더나 개인용 카메라와 비디오 등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래서 학교나 생산 현장 등 다양한 영역에서 부정과 비리를 폭로할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점은 이것이 조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는 이러한 조직화된 폭로를 막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를 가지고 있다. 회사 기밀이나 물리적 공간 자체는 법과 공권력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효과적으로 조직화된 미디어 객체들의 능동적인 움직임이 있다면 이러한 방어막이 단지 종이벽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는 정치적으로 흥미로운 조직 모델을 제공한다. 사회주의의 여러 이슈들, 예컨대 훈육과 즉발성, 중심화와 변경화, 권위적 리더십과 반권위적 리더십 등에 대한 변증법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와있다. 이제 새로운 해결책이 될 수 있는 모델은 네트워크와 같은 방식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에 의해 제시된다. 즉, 독자에 의해 전달되고 재생산되는 매스-뉴스페이퍼나 혹은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그룹의 비디오 네트워크등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미디어는 다시 한번 부르주아 계층의 사유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활발한 생산과 교육을 통해서만이 개별적으로 고립된 미디어로부터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정치적 견지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희생을 마다하지 않을 때 가능한 일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오늘날 자본주의는 가상의 필수품을 창출해 그를 통한 착취로 유지된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사실이다. 유명한 미국의 사회학자 밴 패커드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얻어진 결과가 무용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제한적이란 얘기다. 그들의 말처럼 광고등에 의해 가상적으로 창출된 필요는 대량의 대중에 의해 소비되는 것이 사실이다. '소비자의 테러'라는 가설은 중산층의 선입견에 의해 조성된다. 그 자신들은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깨어있고 옳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들은 부패한 부르주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랑소비에 대한 매력은 필요하지 않은 것을 필요한 것으로 알게 하는 세력 때문이 아니라 정작 필요한 것들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힘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부분을 발겨내어 정치적 이슈화하고 생산적인 것으로 연결시켜 나가는데 그 역할이 있다.

미디어 산업에 있어서도 같은 이론이 적용될 수 있다. 전자 미디어는 강력한 사회적 요청에 반응한다. 대중의 요구란 사실 모호한 것이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인 목소리가 있을 때 전자 미디어는 그에 따른 생산물을 내놓게 된다. 물질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둘 중 하나, 즉 가상의 것을 필요로 느끼게 하는 유토피아적인 부분과 실질적이면서 정치적으로 필요한 부분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누르는 관계가 유지된다. Henry Lefebvre에 의하면 스펙터클이란 것, 즉 물건이나 가게의 쇼윈도, 교통과 광고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세계, 뉴스와 패키징, 건축과 미디어 프로덕션 등은 하나의 형태로 합쳐져 영구적인 극장, 예컨대 공공 도시의 중심과 개인적인 인테리어에 주도적 영향을 끼친다. '아름다운 삶'이라는 표현은 가장 평범하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오브제들을 물신주의적 페스티벌, 상품의 승리 속에 완전히 새로운 가치로 전환시킨다. 스펙터클로써의 소비는 유토피아적 상황으로 사람들을 이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반응형